한국의 풍류다인.....2
최치원(崔致遠)과 해인사(海印寺)

신라말 석학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이 은거했던 가야산 해인사.
다섯 번의 화재에도 끄떡없었던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있는 법보종찰 해인사는 불보종찰 통도사와
승보종찰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사찰 중 하나다.
이 해인사를 거쳐 지나간 인물은 부지기수다.

추사 김정희를 비롯하여 임진왜란때 홍길동으로 알려진 정인홍
대장경판 조성에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긴 이거인 그리고 쌍계사
진감국사 비문을 쓰면서 차에 대한 글도 남긴 최치원이 만년을
은거해 보낸곳으로 차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새롭게 기억 될
것이다. 최치원이 지은 쌍계사 진감국사비는 신라 중대의 교학
불교의 모순과 한계  신라말의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발생한 선종사(禪宗史)를 총정리한 4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다.

최치원은 이 비명을 쓰면서 “다시금 중국차(漢茗)를 바치는
사람이 있기에 가루를 내지 않고 돌솥에 넣어 섶나무로 불을
때어서 삶았는데 나는 차맛이 어떠함을 알고자 함이 아니라 그저
배를 적실 뿐이다.”라고 하면서 올바른 것은 지키고 속된 것은
버림이 모두 이와 같다고 적고 있다.

진감국사는 당나라 유학승으로서 쌍계사를 창건 하였거니와
최초로 범패(梵唄)를 전하기도 했는데 그가 가루차를 마시던
당시의 음차속을 속된 것으로 여겼듯 최치원은 그러한 속된 풍습을
비판하는 글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는 12살 때 당나라로 유학을 가 6년만에 장원을 했다.
강소(江蘇)지방의 원님 벼슬까지 얻었으나 이방인이란 한계가 있어
그의 재능과 포부를 접고 28세 때 신라로 돌아온다.
그당시의 신라는 황혼에 접어들고 있던 때로 조정은 썪고 사회는
혼란했던 시기였다. 이를 보다못해 시무10조목(時務十條目)을
임금께 올려 보았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최치원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가야산 해인사로
은거해 버린 것이다.

해인사 말고도 근처의 절을 자주 찾았다고 전하는데 근처의
스님들은 절을 많이 찾아 다녔는데 어찌 차 한잔 마시지 않았겠
는가 라고 얘기한다. 최치원이 남긴 차에 대한 기록은 진감국사
비문 외에는 현재까지 전해지는건 없다.
하지만 비문의 내용과 그 당시 시대 상황으로 봐서 최치원이
차를 즐겼으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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