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다송

방문자분께서 너무나 소중한 자료를 주셔서 새로이 올립니다 동다송하면 이미 차서적의 고전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참고하셨으면 하는 바램에서 인용합니다 배익기님의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주해서는 배익기님께서 새로이 번역하여 곧 출간할 예정이라합니다 미리 글을 인용케 허락해 주심에 다시한번 여러 방문자를 대표하여 고마움을 전합니다

동차송東茶頌.
동차송은 사문沙門인 초의艸衣 장의순(張意恂/1786~1866)이 열일곱수首의 시를 짓고 백파거사가 한 수를 제題해 붙인 연시連詩로 된 것인데 송을 지은 헌종3년(1837) 당시까지의 차고전을 참작한 기반위에 읊어진 것으로 스스로 주註를 붙여 시문의 이해를 도왔다 송頌은 용容의 뜻으로 풍風 아雅와 함께 시경詩經을 이루는 한 형식으로 나와 있다 차에 관한 고전이 많으나 이 글은 바다동쪽 우리차의 우수성을 알리고 차풍속을 다시 떨치기 위해 기려 읊어 알린 것이다 흔치 않은 우리 차서茶書의 고전이 되었으니 이를 통해서 장차 우리 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장의순은 자가 중부仲孚 호는 초의艸衣로서 15세에 남평南平 운흥사雲興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으며 정약용에게 학문을 배우고 신위申緯 김정희金正喜와 친교가 깊었으며 후에 해남의 두륜산頭輪山 일지암一枝庵에서 수도하며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화엄경을 새길 때 증사證師가 되었으며 그의 글을 모은 초의집艸衣集이 있다.
茶의 우리 음은 차와 다가 있는데 "차"의 구개음화가 이루어 지지 않은 우리 음은 "타"로서 원음이나 고음은 다에 가까왔던 것으로 보이고 원래부터 음의 계통을 달리해 들어왔던 것은 아닌듯 하고 다만 종래 민간에 현행음은 차로 불러와 茶山도 원래 정약용 본인이나 속음이 차산으로 불렀을 것 같은데 어느 경우에 차로 부르고 어느 경우는 다로 쓴다는 규칙없이 근래 문언에서는 새삼 다로 읽는 경향이 있는듯 하다 그러나 광의廣義의 차는 차로 하고 본래 차는 다로 한다는 관례가 생긴것도 아니고 오히려 지금 주로 커피를 파는 곳을 다방이라 하는 반면 진차眞茶를 위주하는 곳은 이른바 전통찻집의 찻집으로 서로 구별해 부르는 듯하니 아직 우리 차풍속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듯한 만큼이나 이 또한 그때그때 되는대로 뒤죽박죽으로 부르고 조리가 서지 않은듯해 어디서 차로 하고 어디서 다로 하기도 곤란하니 종래 불러오던 대로 여기서는 일단 차의 음으로 되도록 획일해 나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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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차송東茶頌.
(承海居道人命作 艸衣沙門意恂.
해거도인의 명을 받들어 지음, 초의사문 의순.)
*해거도인은 정조의 부마 홍현주.

南國嘉樹.
后皇嘉樹配橘德 受命不遷生南國
密葉鬪霰貫冬靑 素花濯霜發秋榮

남국의 가嘉한 나무.
후황后皇이 나무를 가상嘉尙히 해서 귤의 덕에 짝하니 명을 받음이 옮기지 않아 남국에 산다.
빽빽한 잎은 싸락눈과 싸우며 겨우내 관철해 푸르고 흰꽃은 서리에 씻어 가을꽃을 낸다.
*초사의 귤송에 后皇嘉樹 橘徠服兮 受命不遷 生南國兮등의 말이 있으니 그 뜻은 후토가 나무를 가상히 대하니 귤이 와서 복속한다 명을 받음을 옮기지 않아 남국에 산다...,
*주역 문언전에 형亨이란 것은 가嘉의 회會다.하고 또 가회嘉會로 족히 예에 합당한다.는 구절이 있으니 원元이 봄 리利가 가을 정貞이 겨울로서 형은 여름의 덕을 나타내는 말이니 가嘉는 가佳의 뜻과 통하고 갑남을녀 각자 커는데로 커서 누구랑 살아도 이래 못살까 하거나 어디 심은들 별반 다를 것도 없다면 굳이 가회라 말하기 부족할 것이다 또한 무슨짓을 하는지 별스럽게 쉬쉬 몰래 만나고 심는다면 합례할수 있을까 초사의 귤송에 가수嘉樹라 하고 육우의 차경에도 차는 남방의 가목嘉木이라한 것은 특히 맞는 조건이 따로 있어 이로 아름다움을 이룰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륜(1347-1416)이 김해의 금강사金剛社에 유람한 기문에,
" 금강사에 산차山茶나무가 있어 한 뜰을 그늘 지운다 전조의 충렬왕이 연輦을 여기 세우고 장군이라 호를 내렸으니 부노들이 서로 전하며 미담으로 여겼다 내가 예전 소년에 객이 되었는데 때마침 중춘仲春이라 산차나무가 무성히 피었다 머물러 감상하기 반나절이나 오히려 족하지 못했다."
했으니 고려 충렬왕은 당시 정왜군征倭軍을 전송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산차는 지금 흔히 동백이라 부르는 차나무 종류로 역시 잎으로 음료하는데 잎이 무소가죽처럼 질기고 비늘같은 잎이 빽빽이 에우니 마치 나무가 어린갑魚鱗甲을 입어 무창武昌한듯 함에 두고한 말로 초의가 빽빽한 잎이 싸락눈과 싸운다 표현한 싯구는 역시 들은바가 있어서 일 것이다.

琴禽舌.
姑射仙子粉肌潔 閻浮檀金芳心結
沆瀣漱淸碧玉條 朝霞含潤翠禽舌

취금설翠禽舌.
막고야산의 선인의 분같은 살결로 깨끗하고 염부단금의 금꽃술 맺혔으며
밤이슬에 맑게 씻은 벽옥가지에 아침노을 머금어 윤나는 비취새 혀로다.
*장자 소요유 편에 막고야의 산에 선인이 사는데 살갖이 빙설같고 작약히 처자 같으며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을 호흡하고 이슬을 마시며 구름의 기류를 타고 나는 용을 몰아 사해의 밖에 노니 그 신이 응키면 물건이 병해되지 않게하며 년해의 곡식이 익는다 함.
염부는 아함경에 나오는 큰 나무 이름으로 이 나무 밑의 강에서 금이 나는데 이를 염부단금이라 한다 함.

(茶 樹如瓜蘆 葉如梔子 花如白薔薇 心黃如金 當秋開花 淸香隱然云
李白云 荊州玉泉寺 淸溪諸山 有茗艸羅生 枝葉如碧玉 玉泉眞公常采飮.

차는 나무가 과로瓜蘆같고 잎은 치자梔子같으며 꽃은 백장미 같고 꽃심은 누렇기 금같고 가을을 맞아 꽃이 피어 맑은 향이 은은하다 이른다.
이백李白이 이르기를 형주 옥천사의 청계의 여러산에 명茗풀이 있어 퍼져 나있으니 가지와 잎은 벽옥같은데 옥천사의 진공眞公이 늘 따서 마신다)
*과로는 차경에 육우가 스스로 주하길 남중국의 광주지방에 나는 차 비슷한 나무로 지극히 쓰고 떫다고 하였다.
* 이백(701-762)은 당의 금주 창융현 청련향사람으로 시에 능해 당 현종의 측근으로도 있었다 그의 "족질되는 승 중부가 옥천의 선인장차를 드린데 답한 시와 서"를 보면 종유석 사이에서 옥천이 교류해 흘러 나오는 주위로 차가 무성한데 차과를 볕쬐어 이룬다는 것으로 보아 이때 배화불에 의지하지 않고 차과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 유종원의 연주군복유혈기에도 종유석을 보양식의 가장 좋은 것이라 하였다 본초강목의 석종유에 대한 여러설을 보면 돌젖이 떨어져 쌓여 된 것으로 가벼이 먹는게 아니라 땀을 많이 흘리고 갈증이 나는데 빻아 체질해 흰명주에 싸서 여러 약초와 합해 술에 담궈 복용한다 하며 또는 잘 갈은 고운 가루를 금은그릇안에 두고 기와 한 조각으로 꼭 덮어 기운이 새지 않게 해서 찌면 자연 물로 화한다는 처방도 있으며 삼과 삽추를 꺼려 범하면 죽는자 많다고도 하며 맥문동 독산獨蒜 구실(전구지 열매) 호총胡蔥 호수(고수) 묘아안초猫兒眼草는 모두 복용할수있다 하는데 대체로 여러설을 종합해 보면 원기허한해서 방사를 잘 일으키지 못하는데 주로 쓰이는 것 같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종유석을 궁중에 진상되어 썼다는 얘기가 당지에 전하며 종유석은 곧 우리말로 고드럼돌로 곶감 꼬쟁이 고(코) 곳(꽃, 특히 피기전의 뽀족한 봉오리,또는 물로 뾰죽이 들어간 땅 串.)처럼 뾰족한 돌 고시가 드리워진 것을 말하는 것이니 강원도에 고씨동굴이 있고 충북에 고수동굴이 있어 이는 종유석동굴임을 말하는 통칭으로 비롯해 이름한 것이다.

天人俱愛.
天仙人鬼俱愛重 知爾爲物誠奇絶
炎帝曾嘗載食經 醍酉+胡甘露舊傳名.

하늘과 사람이 모두 사랑함.
하늘과 신선,사람,귀신 모두 사랑하고 귀중히하니 너의 물건됨이 실로 기이하여 다시없음을 알겠구나
염제가 일찌기 맛보고 식경에 실었고 제호 감로라는 이름이 예부터 전한다

(炎帝食經云 茶茗久服 人有力恍志.
王子尙詣曇齋道人于八公山 道人設茶茗 子尙味之曰 此甘露也.
羅大經약湯詩, 松風檜雨到來初 急引銅甁離竹爐 待得聲聞俱寂後 一區+瓦春雪勝醍酉+胡.

염제식경에 이르기를 차를 오래 복용하면 사람이 힘을 갖고 뜻을 기쁘게 한다고 한다.
왕자상王子尙이 담재도인雲齋道人을 팔공산에서 뵈니 차를 베푸는데 자상이 맛 보고 이는 감로甘露라고 하였다.
나대경羅大經의 약탕시에, 솔바람과 전나무에 비소리로 도래해 끓는 처음에 급히 구리병을 당겨 죽로竹爐에서 떼어서 물끓는 소리가 모두 적적해진 뒤를 기다려 얻은 한잔의 봄눈을 녹인 것은 제호보다 낫다.)
*염제炎帝는 불의 덕이 주제하는 것을 일컬은 것으로 계절로 여름이며 불이 되어 상징색은 붉은색이며 방위는 남방이다 적제赤帝라고도 부르며 농경이 여기 속하게 되어 신농씨 또는 염제신농씨라 합칭해 부르는데 신농식경이란 글은 달리 전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며 육우의 차경과 본초강목에 인용제목으로 나오는데 본초강목의 역대제가본초나 인거고금의가서목에 목록이 없는 걸로보아 아마 강목에서는 이전에 인용된 글에서 재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회남자에 일찌기 신농이 온갖풀의 재미滋味를 맛보고 하루에 70독을 만났으며 이로 말미암아 의방醫方이 흥했다 한다 원래 도를 지닌 바 있는 이가 자신의 이름으로는 글을 내어도 세인이 경전의 권위만 알뿐 세상에 펴지는 못하기에 신농 황제등의 이름으로 내게 된 것이라 하니 허위유포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흔히 무슨 경經이라 하며 날조해 내는 것과는 다르다 하겠다 .
*차경에는 송록宋錄이라하여 신안의 왕자란과 예장의 왕자상이 팔공산으로 담제도인曇濟道人을 뵈었는데 도인이 차명茶茗을 베풀자 자상이 맛보고 말하길 이는 감로입니다 어찌 차명이라 말하십니까. 라고 했다고 되어있다 왕자상과 자란은 모두 위진남북조시기 남조의 송나라(420-479) 때 효무제의 아들로서 폐제에게 자결의 명을 받았다 팔공산은 회수의 남쪽 안휘성 봉대현의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회남자를 짓게 한 한나라 회남왕 유안이 이곳에서 여덟명의 명사를 초빙한데 유래한다.
나대경(1195~?)은 남송때 사람으로 자는 경륜 그의 글 한림옥로 권18에 인용시가 있음.
*제醍는 청주로서 붉게 색을 이룬 것이고 제호는 본초강목에 보면,
소공이 말하길 제호는 소酉+禾(*젖을 끓인 락酪을 식히면 윗면에 응키는 것) 안에서 나는데 곧 소의 정액精液이다 좋은 소 한석에 서 너되의 제호가 나온다 익혀 저어 제련해서 그릇안에 넣고 응키기 기다려 가운데를 밑에 이르도록 뚫어 진액이 나옴을 취한다.
한보승이 말하길, 일설에 소 안에 있어서 한겨울에도 엉키지 않고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것이 이것이다.
구종석이 말하길, 락을 만들때 위에 한층 응킨 것이 소가 되고 소 위의 그 유油 같은 것이 제호가 된다 오래 쑤면 곧 나오는데 많이 얻을수 없고 극히 감미甘美하다 쓰는 곳도 적다.
장기가 말하길, 이 물건은 성질이 미끄러워 물건에 채우면 모두 투철한다 오직 계란껍질과 호로에 채워야 나오지 않는다.
*노자에 천지가 서로 합하면 감로가 내린다했는데 이는 상징적 의미에서 한 말이고 감로는 이슬이 달고 기름같이 짙은 것을 말하는데 일통지에는 아주의 몽정산 위에는 늘 이것이 있다하고 일설에는 초목이 갑자기 시들때 성분이 배여 나오게되어 그런 것으로 길상이 아니라고도 한다.

解醒少眠.
解醒少眠證周聖 脫粟飯菜聞齊영
虞洪薦食+氣乞丹邱 毛仙示艸밑聚引秦精.
*영은 瓔의 玉 없는 간난애 영.

취한 것을 풀고 잠을 적게함.
취한것을 풀고 잠을 적게 함은 주나라 성인이 증거하고 껍질만 벗긴 조밥 나물은 제나라 영에게 들었다
우홍이 음식을 청하는 단구자에게 드리고 털난 선인이 진정을 이끌어 차떨기를 보였네.

(爾雅, 木+賈苦茶.
廣雅, 荊巴聞采葉 其飮醒酒令人少眠.
晏子春秋, 영相齊景公時 食脫粟飯 炙三戈 五卵 茗菜而已.
神異記, 餘姚虞洪 入山采茗 遇一道士牽三靑牛 引洪至瀑布山曰 予 丹邱子也 聞子善具飮 常思見惠 山中有大茗 可相給 祈子他日 有區+瓦犧之餘 乞相遺也 因奠祀後入山 常獲大茗.
宣城人秦精 入武昌山中採茗 遇一毛人 長丈餘 引精至山下 示以艸밑聚茗而去 俄而復還 乃探懷中橘 以遺精 精怖 負茗而歸.

이아에, 가木+賈는 고차苦茶다.<*굳이 말한다면 茶자가 만들어 지기 전에 쓰인 이아의 석목釋木편에는 차가 아니라 고채苦菜(쓴냉이)인 도艸밑余 임. 육우의 차경은 당개원문자음의에 따라 차茶자로 쓰여진 것을 초의가 옮긴 것이다 중국도 차의 음이 고채의 도(tu)와 차茶(cha)에서 각기 비롯해 보이는 두가지가 있으나 도와 차자는 이미 한나라 때의 기록에서 부터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광아에,형주와 파주 간에는 잎을 딴다 그 마심이 술깨고 사람으로 하여금 잠을 적게한다.
안자춘추에,영이 제나라 경공의 재상을 할때 껍질 벗긴 조밥을 먹고 적 세꼬치와 계란 다섯 차나물 일뿐이다.
신이기에, 여요땅 우홍이 산에 들어 차를 따다가 한 도사가 푸른소 세마리를 끄는 것을 만났는데 우홍을 인솔해 폭포산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단구자丹邱子다 자네가 마시는 것을 잘 갖춘다는 것을 듣고 혜택 받아보기를 늘 생각했다 산속에 대명大茗이 있으니 서로 줄수있다 자네가 다른날 음식의 남는 것이 있으면 서로 끼쳐 주기바란다.<*구區+瓦는 잔이고 희犧는 희생용 소를 무늬한 술단지로서 구희로 합칭해 제사에 대한 말로 흔히 쓰인다 예기 곡례편에 남은 음식으로 제사지내지는 않는다 하고 잔을 마신자는 뿌리지 않는다 했는데 여기서는 자신에게 향사를 청하는 입장이므로 스스로 낮춰 말한 것이다> 이로 인해 제사하고 입산하니 늘 대명을 얻었다.
선성사람 진정이 무창산 속에 들어가 차를 따다가 한 털사람을 만났는데 길이가 한길남짓이라 진정을 이끌고 산아래에 이르러 떨기차를 보이고 가더니 조금있다가 다시 돌아와 품속의 귤을 더듬어 진정에게 주니 진정이 두려워해 차만 지고 돌아왔다.)
*주나라 성인은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을 두고 한 말로 이아는 구체적 작자가 없이 주공이 지은 것이라 전하는데 전국시대로 여겨지는 말도 있어 훈고적 내용이 전국시대와서 최종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다 여기에 가는 고도라는 말이 나오는데 진晉의 곽박(276-324)이 주하기를 "나무의 작기가 치자같고 겨울에 잎을 내며 삶아 국을해 마실수 있다 지금 일찍 따는 것을 도라하고 늦게 딴 것을 명茗이라 부른다 일명 천艸밑舛이라 하며 촉인이 고도라 부른다." 하였다.
*단구는 선인이 사는 밤낮없이 밝은 언덕이란 곳인데 이는 단丹은 광물 주사朱砂의 옛이름 이고 곧 남쪽의 붉은 불을 상징하는 것으로 차가 남방의 특산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이름 진정秦精은 곧 진艸밑秦精으로 수풀의 정精한 것이란 뜻으로 의인화한 것이며 무창武昌은 곧 무갑武甲이 창성하다는 것으로 소가죽처럼 질기며 빽빽한 비늘같은 잎이 둘린 차나무를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빗대어 이런 차나무가 무성한 산이라는 말이다 털사람도 산의 수풀을 의인화 한 것으로 키가 한길이 넘었다니 교목의 차나무를 두고 한 말이겠고 귤을 산숲에서 찾아 내었다는 것이지만 차만 가져왔다는 것은 주역 수뢰둔괘의 육삼효에 산지기의 길잡이도 없이 산록으로 나아가 오직 숲속으로 든다 군자 기미가 그만두는 것 같지않다 가면 낭패리.라는 구절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진정은 길잡이를 만나 차를 얻었음에도 또한 귤을 갖는 데는 이르지 못했으니 이는 아직 차가 귤의 덕을 넘어서지 못하고 진상품이 되기에는 자신이 부족함을 말하기도하다 귤처럼 당장 보고 알수도 없고 먹어도 즉효는 커녕 달리 병이 있어 특별히 구하는 것도 아닌데 언듯 쓰서 못먹을 싸구려 풀잎 같은 것을 선약이라고 했다가 감히 사기친다고 덮어쓰거나 거짓의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하민이 무엄하게 이런 것을 어디다 들이밀고 방자히 위신을 깍으려 하느냐가 되면 옥을 초왕에게 바치려고 했다가 돌이라고 거듭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던 변화와 같은 꼴을 당하기 쉬운 것이다.
*광아는 후한과 수나라 사이인 위진남북조시기 위나라(220-265)의 명제때 박사를 한 장읍張揖이 이아를 보충해 넓힌글 그래서 박아博雅라고도 한다.
안자춘추는 전국시대 제나라 재상 안영에 대한 글
신이기는 한 무제때 동방삭의 글
폭포산은 절강성 여요현에 있는 산으로 차경에는 폭포천령瀑布泉嶺에서 나는 차는 선명仙茗이라 한다 함
무창산은 호북성 악성현 남쪽에 있는 산.

開皇醫腦.
潛壤不惜謝萬錢 鼎食獨稱冠六情
開皇醫腦傳異事 雷莢茸香取次生.

개국황제의 뇌를 치료함.
흙에 잠긴 것이 만금으로 사례하는 것을 아끼지 않고 정식鼎食하는 집안에서도 홀로 육정六精의 으뜸이라 일컫는다
개국황제의 뇌를 치료한 남다른 일로 전하고 뇌협차 용향차가 차례로 생겼다.
*정식지가라 해서 벼슬한 귀족세가를 말하고 육정은 주례의 천관선부조에 보면 물 미음장漿(짜장따위) 단술 엿물 전국술 짠물장醬(간장)을 말함.

(異苑, 剡縣陳務妻 少與二子寡居 好飮茶茗 宅中有古塚 每飮輒先祀之 二子曰 古塚何知 徒勞人意 欲堀去之 母禁而止 其夜夢一人云 吾止此三百餘年 鄕子常欲見毁 賴相保護 反享佳茗 雖潛壤朽骨 豈忘예桑之報 及曉 於庭中獲錢十萬.
張孟陽登樓詩, 鼎食隨時進 百和妙具殊 芳茶冠六情 溢味播九區.
隋文帝微時 夢神易其腦骨 自爾 痛 忽遇一僧云 山中茗草可治 常服之有效 於是 天下始知飮茶.
唐 覺林寺僧 志崇 製茶三品 驚雷莢 自奉 萱草帶 供佛 柴茸香 待客云.

이원에, 섬현의 진무의 처는 젊어서 두아들과 더불어 과부로 지냈는데 차마시기 좋아하더니 집안에 옛무덤이 있어 매번 마실때 번번히 먼저 향사하니 두 아들이 말하길 옛무덤이 무얼 알관대 헛되이 사람의 뜻을 고달프게하나하고 파내려하니 어미가 금해 그쳤는데 그 밤에 한사람이 꿈에 이르기를 내가 여기 머문지 삼백여년이거늘 댁의 아들이 늘 뜯김을 받게 하려는 것을 힘입어 서로 보호받고 도리어 아름다운 차를 향응받으니 비록 흙에 잠긴 썩은 뼈일 망정 어찌 예상에서 은혜받은 것을 보답한 일을 모르리요 하였다
새벽에 이르니 뜰가운데에서 돈 십만전을 얻었다.
(*차경에서는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듯한 헌돈에 꿴 끈만 새것이었다는 글로 보아 누가 돈을 갖다 놓았는가본데 옛무덤은 보통 움실같기 마련인데 젊은과부가 차를 핑계로 밀통장소해서 들락거리며 실제 산사람에게 향응해 자식들이 뜯으려했는가 하기에는 구체적 내용없이 변명할수 없는 고인을 모독할수는 전혀 없는 일이고 엽전葉錢이라고 해서 가랑잎처럼 날아오진 않았을 것이고 뭔가 이무덤에 사연이 있음을 알고 애지한 것일 것이다 새돈이었다면 혹 의심 받을 것이다)
장맹양의 등루시에, 정식지가에서 때에 따라내는 것이 온갖 고루어 묘하게 특별해도 꽃다운 차가 육정의 으뜸이니 넘치는 맛이 온누리 퍼진다.
수나라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을때 꿈에 신이 그 뇌골을 바꾸었는데 이로부터 통증이 있었는데 홀연히 한 중을만나니 이르기를 산속에 명茗풀이 다스릴수있다 늘 복용하면 효과있다. 하여 이에 천하가 비로소 차마시기를 알았다.
당의 각림사 중 지숭이 차 삼품을 제조하니 경뢰협驚雷莢은 스스로 먹고 훤초대는 부처에 공양하고 시용향은 객을 대한다 이른다.)
*주역 진괘에 우레 혁혁히 오고 웃는 말이 액액한다는 구절이 있으니 경뢰소는 우레가 비로소 치면 허둥지둥 서둘러 차 딴 것을 말함이겠다 일년을 24절기로 나누니 각 절기마다 보름의 간격이 되는데 입춘에서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를 지나 입하까지의 석달 봄에서 신당서 율력지에는 춘분(3월 21일경)에 비로소 우레가 친다하나 이는 대체로 우리 기후와 비슷하고 당때 차딴 것은 복건지역의 차가 아닐 것으로 송 휘종의 대관차론에는 건주차는 경칩이 차따는 시후라 하였다.
훤초대는 시경 위풍의 백혜시에,
백伯은 날세어 나라의 호걸이라
백이 긴창잡고 왕을 위해 앞서 몰아가네
백이 동쪽으로 가고부터 머리는 나부끼는 쑥대같다
어찌 기름발라 머리감지 못하리 만은 누를 맞추러 용모하리
비야 비야 하건만 고고히 해가 나네
백을 생각해 머리아픈 것을 감심甘心하겠거니와
어떻게 훤초(훤추리, 망우초,잊을 훤)를 얻어 뒤곁에 심어야지
백을 생각해 내 마음 고달프게 하네.하였다.
이로보아 훤초대를 부처에 바쳤다는 것은 즉 부처를 생각해 주야로 염불하며 마군이를 쫓고 성불하려는 수도의 고뇌를 차로 다르린다는 것이 되겠는데 실제 얼마나 많은 중들이 그렇게 수도에 정진하는지 물을 것도 없이 하는자는 하고 못하면 그만이지만 노력이라도 하는 것과도 다르게 하지도 않으면서 하는듯 팔면 이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어쨌든 가륵한 뜻이다 결국 수문제가 황제의 궁리로 골치아픈 것을 다스렸다는 것이나 젊은 과부가 차다리기 한 것과 맥락이 같은데 나는 선승들의 지금 차선에 대해 모르지만 이는 이때의 茶禪의 기본관념과 음용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이해를 말해주는 주요한 단서가 되며 뒤의 차마시고 가라는 조주선이나 이에 대해 세간에 전해 이해 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점이 있다 하겠다 훤추리는 본초강목의 일설에 먹으면 바람이 일어 사람이 술에 취한듯 해져 근심을 잊게 되기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시진이나 다른 의가의 견해처럼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이를 삶아 나물한 것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안먹던 것을 먹어선지 몇몇과일과 호박등의 풀열매를 섞어 달인 즙을 마셨을 때 처럼 살살 배탈이 나려는 듯해서 그만 두었을 뿐이다 또한 먹기 위해 훤추리를 구한다고 한 뜻이라면 비록 봄의 나물싹이 아니라 혹 약용으로 다른 시기의 것을 바라서 였다고 하더라도 그리 구하기 까다로운 물건도 아닌데 시에 그냥 때에 따라 채採 하겠다고 하면 그만 일 것인데 굳이 얻어서 뒤곁에 심는다고 할것은 없는 것으로 뒤곁은 옛날 부녀가 거처하는 후원이다 내 경험으로 생각컨데 훤추리는 늦여름에 비오기 전날 노을이 짙듯 주황색 꽃이 피고 뒤이어 장마가 오고 더러 꽃이 한참 필때 오기도 한다 시에는 주역 수괘需卦의 뜻이 있으니 부녀가 후원에서 훤추리 꽃을 완상하며 시름을 달랜다는 뜻이다 또한 아이밴 여자가 이풀을 지니면 아들을 낳는다 해서 의남宜男이라고도 한다.
*예상은 춘추시대 진의 대부 조순이 굶주린 사람을 구해준 일로 뒤에 목숨을 보답받게 되었다는 고사.
*이원은 남북조때 남조 송나라의 유경숙이 요괴담을 모은 글.
섬현은 절강성 승현의 서남쪽에 있던 고을.
장맹양은 위진남북조시기 진晉나라 사람 장재張載로서 용모가 심히 누추해도 박학하고 글을 잘했다하며 무제때 저작랑을 지내고 홍농태수로 거듭옮기고 중서시랑에 이르렀으나 세상이 막 어지러워지자 귀가해 여생을 마쳤다 한다 그의 글 장맹양집은 명나라 사람이 편집한 것이다.

百珍雋永.
巨唐尙食羞百珍 沁園唯獨記紫英
法製頭綱從此盛 淸賢名士誇雋永.

온갖 진미중에 준영이.
큰 당나라가 음식을 숭상하니 진수가 백가지이나 심원에서는 유독 자영紫英을 적었다
법제하는 강목이 이를따라 성해져 맑은 현사와 이름난 선비가 준영雋永을 떠벌렸네.
*심원은 후한 명제때 공주의 동산이 심수沁水가에 있은데서 비롯한 것이라 한다.
*준雋은 살찐 새고기인데 한나라 괴통이 전국시대 때의 일을 논한 글을 지어 준영이라 했는데 그뜻은 의미가 심장深長하다는 말이다.

(唐 德宗 每賜同昌公主饌與茶 有綠花紫英之號.
茶經稱茶味雋永.

당나라 덕종이 동창공주에게 찬과 차를 내릴때마다 녹화綠花와 자영의 호칭이 있었다.
차경에 차맛의 준영을 일컬었다.)
*덕종은 차를 즐겼는데 흔히 소酉+禾나 후추를 가미해서 음료했다한다

一染失眞.
綵莊龍鳳團巧麗 費盡萬金成百餠
誰知自饒眞色香 一經點染失眞性.

한번 물들면 참을 잃음.
채색 단장한 용봉단은 교묘히 고와 만금을 다 써서 백개의 떡을 이루었다
누가 알리 스스로 참향과 참색이 넉넉한데 한번 찍어 물들면 참된 성을 잃음을.

(大小龍鳳團 始於丁謂 成於蔡君謨 以香藥合而成餠 餠上飾以龍鳳紋 供御者 以金莊成.
東坡詩, 紫金百餠費萬錢.
萬寶全書, 茶自有眞香 眞味 眞色 一經他物點染 便失其眞.

크고 작은 용봉단은 정위가 한 것으로 부터 시작해서 채군모에게서 이루어지고 향약으로 합해 떡을 만들어 떡위에 용봉의 무늬를 꾸몄는데 어용에 바치는 것은 금분金粉으로 이루었다.
소동파의 시에, 자금색 떡 백개에 만전을 쓴다.
만보전서에, 차는 스스로 참향과 참맛 참색이 있는데 한번 다른 물건에 찍어 물들리면 쉬이 그 참을 잃는다.)
*단團은 공처럼 둥근꼴의 경단이고 병은 호떡같이 둥글납작한것 보통 용단과 봉병으로 만들었다 송나라 웅번의 선화북원공차록에 보면 개보말년(968-976)에서 태평흥국(976-983)초 그러니까 976년경 처음 만들기 시잣했다 한다 찻가루를 덩어리한 것에 용봉의 무늬를 찍은 상품말차로서 명나라초 홍무24년(1391) 부터 진상이 금지되고 엽차인 차아茶芽로 고쳐 올리게 하고부터는 차츰 외국에 까지 탕에 우리는 포차식 엽차가 유행하고 말차는 보기 어렵게 되어졌다.
*정위丁謂(966-1037)는 송나라 소주사람으로 자는 위지 또는 공언 도관을 일으키고 거듭 상서로운 물건을 올려 총애를 구하고 재상이 되어 환관과 결탁해 정권을 전단하고 진국공에 봉해 졌으나 인종 즉위후 지방관으로 폄직되었다가 뒤에 비서감을 지냄.
*채군모(1012-1067)는 차록을 지은 송의 채양으로 군모는 그의 자字 시호는 충혜 지금 복건성 선유현 사람.

手栽全嘉.
道人雅欲全其嘉 曾向蒙頂手栽那
養得五斤獻君王 吉祥예與聖楊花.

손수 심어 가嘉함을 온전히 함.
도인이 평소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하려고 일찌기 몽산의 정상 향해 손수 그것을 심었네
다섯근을 길러 얻어 군왕에게 바치니 길상예와 성양화로다.
*도인은 관습적으로 불교수도인을 두고 말해왔고 도자道者는 도교, 부대사(497-569)는 자가 현풍이며 남북조때 남조사람으로 결혼해서 자식을 둔 우바새로서 낮에 품팔고 밤에 설교했으며 부대사록 심왕록이 전한다 한다.

(傅大士 自住蒙頂結庵 植茶凡三年 得絶嘉者 號聖楊花吉祥예 五斤 持歸供獻.

부대사傅大士가 스스로 몽정산에 암자를 짓고 머물러 차를 심은지 무릇 삼년에 극히 아름다운 차를 얻어 성양화 길상예라 호하고 다섯근을 지녀가 공헌했다.)

雲澗月.
雪花雲月+臾爭芳烈 雙井日注喧江浙
建陽丹山碧水鄕 品製特尊雲澗月.

운간월.
설화차 운수차가 꽃다운 열렬을 다투고 쌍정차 일주차는 강소 절강지방에 떠들석하다
건양의 단산에 벽옥물 흐르는 동네에서 품제한 것이 특히 운간월을 높인다.

(東坡詩, 雪花雨脚何足道.
山谷詩, 我家江南採雲月+臾.
東坡至僧院 僧梵英葺治堂宇嚴潔 茗飮芳烈 問此新茶耶 英曰 茶性 新舊交 則香味復.
草茶成兩浙 而兩浙之茶品 日注爲第一 自景祐以來 洪州 雙井白芽漸盛 近世製作尤精 其品遠出日注之上 遂爲草茶第一.
遯齋閑覽, 建安茶 爲天下第一 孫樵送茶焦丹部曰 晩甘候十五人 遣侍齋閣 此徒乘雷而摘 拜水而和 盖建陽丹山 碧水之鄕 月澗雲龕之品 愼勿賤用 晩甘候 茶名.
茶山先生乞茗疏, 朝華始起 浮雲효효於晴天 午睡初醒 明月離離於碧澗.
*효효의 효는 세개의 白이 합한 글자로 밝을 효.

소동파의 시에, 설화雪花와 우각雨脚을 어찌 족히 말하랴.
황산곡黃山谷의 시에, 나의 집이 강남江南에 있어 운수雲月+臾를 땄다고 하였다.
소동파가 절에 이르니 중 범영梵英이 지붕을 이어 아주 깨끗이 수리하고 차를 마시는 데 향기가 열렬해 새로 딴 차냐고 물으니 범영이 말하기를 차의 성질이 새것과 옛것이 교차하면 차의 맛과 향기가 중복한다 하였다.
초차草茶는 양절兩浙에서 이루는데 양절兩浙의 차 품질은 일주日注가 제일이다 경우景祐(*송 인종의 연호로 1034-1038) 이래로 홍주洪州의 쌍정백아雙井白芽가 점차 성하더니 근세에는 차의 제작이 더욱 정밀해져서 그 품이 일주日注차의 위로 멀리나와 드디어 초차草茶 중에서 제일이다
둔재한람에, 건안차가 천하제일이 된다 손초孫樵가 차를 초단부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만감후晩甘候 열다섯 사람을 시중하는 재각齋閣에 보내니 이 무리들은 우레를 틈타 딴것으로 <*우레치는 때가 오면 차따기를 시작하는 것을 두고 말한듯> 물에 절해 고루니 대개 건양建陽 단산丹山의 벽수碧水 흐르는 고을의 월간月澗과 운감차의 품은 삼가서 천하게 쓰지 않는다.하였다 만감후晩甘候는 차의 이름이다.
차산 정약용선생의 걸명소乞茗疎에, "아침햇살에 비로소 일어나니 뜬구름이 맑은 하늘에 희디희고 낮잠에서 처음 깨임에 밝은 달이 푸른 산골물에 저만치 떠있다")
*산뜻하게 새집을 지어도 고택에서 우러나는 풍미를 갖출수는 없다 한편 헌집은 흔히 후락하고 시대에 떨어져 살기에 불편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택의 품미를 지니면서 주거에도 맞게하는 것이 묘가 될 것인데 이는 쉽지 않은 일로 도리어 반대로 되거나 이도저도 아니게 되기쉽다 흔히 수리하느니 새로 짓는게 낫다는 것은 보통 경비만의 문제를 따져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둔재한람은 북송 범정민의 글, 손초는 당나라 한유의 문인.
*소동파(1037-1101)는 송의 미주 미산인으로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삼소라 불리며 모두 당송팔대가의 한사람들로 이름은 식, 동파는 그의 호 그의 글은 왕양자사汪洋恣肆 휘주창달揮酒暢達하여 마치 후에 글짓는 이라면 노래가 곧 시작詩作이 되는 만큼 으례 음주가무의 흥이 따르기 마련 이라는 식의 표본이 되었으며 시 또한 웅방청신雄放淸新했는데 이런 도가의 경향성이 있는 문풍은 중국만 풍미했을뿐 아니라 고려의 문원文苑도 그의 문풍에 많이 영향을 받음을 당시 고려문인의 행태와 한림별곡 같은데서 쉽게 볼수있다 그는 자신의 촉당과 상대적인 낙당을 중심으로 비롯하기 시작하는 성리학설에 대해 일유日諭등의 글에서 부정적 입장을 보였는데 초기에 위학僞學으로도 몰렸던 성리학이 후에 결국 남송 원 명에 이르기 까지 국학으로 공인돼 도교나 불교를 내치고 오로지 나설뿐 아니라 사부詞賦나 일삼는 것은 것은 도학자의 할 바가 아닌 것으로 구별되면서 주렴계와 소강절 정이 정호 두 정씨나 주자등의 성리학자 외에 자연 그에 대한 언급도 무대밖으로 내 몰리다시피했으나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이전까지의 한족의 학문적 경향에 대해 비판성을 띠고 고증학등이 일며 체계적으로 성리학을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자연 그에 대한 새로운 등장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문원의 세습귀족문신적 왕양호방한 문풍과 달리 조선중기 이후 성리학풍의 삼가고 성실히 천착하는 도학자적 수신이 요구되고 학풍 역시 산림처사나 과거출신의 지방사대부적 인물경향이 크게 작용해 이끌어 나가게 되었으며 더우기 퇴계가 도산십이곡발에서 우리 동방가곡은 대저 음탕 왁자함이 많아 말하기 부족한데 한림별곡같은 류는 문인의 입에서 나왔으나 긍호방탕矜豪放蕩 한데다 설만희압褻漫戱狎을 겸해 더욱 군자의 마땅할 바가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등으로 위의 고려문원풍인 한림별곡류의 경기체가가 종언을 고하게 되다시피하고 또한 퇴계처럼 주자의 무이곡 형식을 따라 대신하게 되었던 것인데 조선후기에 와서 조선에서도 북학파에 따라 성리학이 비판되기 시작하고 실학이 등장하면서 역시 이글에서도 성리학과 관련되어 나온듯한 언급이 없는 만큼이나 반비례해 거듭 소동파에 관한 말이나 그와 관련된 인물등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는 것 등은 위의 사정과 감안해 볼때 일찌기 추사가 동파에 대해 보인 존숭등과 결부해 생각해 볼수 있다.
*황산곡(1045-1105)은 송의 강서출신인 황정견으로 자는 노직 산곡은 그의 호.
*차산선생(1762-1836)은 정약용으로 차산은 그의 호중에 순조1년인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에 관련되어 그가 18년간 전남 강진에 귀양살던 곳의 산이름에서 딴것이다.

味藥兼兩
東國所産元相同 色香氣味論一功
陸安之味蒙山藥 古人高判兼兩宗

맛과 약 둘을 겸함.
우리나라에서 나는 차는 원래 같은 것으로 색과 향 기氣와 맛의 공이 같음을 논하고
육안차의 맛과 몽산차의 약을 옛사람의 고견으로 둘을 겸했다 판정했다.

(東茶記云 或疑東茶之效 不及越産 以余觀之 色香氣味 少無差異 茶書云 陸安茶 以味勝 蒙山茶 以藥勝 東茶 盖兼之矣 若有李贊皇陸子羽 其人必以余言爲然也.

동차기東茶記<*정약용의 글>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차의 효용이 월주의 차보다 못하지 않나 의심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가 보건대 색과 향기와 기와 맛이 조금도 차이가 없다 차서茶書에 이르기를 육안의 차는 맛으로 낫고 몽산蒙山의 차는 약으로서 낫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차는 대체로 겸했다 만일 이찬황이나 육우가 있다면 그 사람들이 반드시 내 말로서 그렇다고 하리라.)
*이찬황(787-850)은 당의 재상을 지낸 이덕유李德裕로서 그는 조군사람인데 자는 문요文饒 길보자吉甫子라고 하며 찬황贊皇이란 호는 당 무종때도 재상을 하며 지방세력을 깍고 황권을 높이는데 극력하고 재상을 한데 관계되어 보인다 그 또한 멀리 혜산물을 길어 먹었으며 차에 감식안이 높았으며 차즙을 육식에 부어 시험해 본 일화가 전한다.
*육우(약733-약804)는 당의 복주(지금 호북성 천문현) 사람으로 자는 홍점이고 일명은 질疾이며 자는 계자季疵이며 자칭 상저옹이라 하고 또 다른 호로는 동강자라 하며 여시인 이계란 중 교연과 자못 우호가 있었다.
*육안陸安은 六安이라고도하며, 육안차는 중국 안휘성 곽산현에 나는 차.

八老밑至還童.
還童振枯神驗速 八老밑至顔如夭桃紅
我有乳泉 把成秀碧百壽湯 何以持歸木覓山前獻海翁
*잡을 把는 뜰읍手+邑의 오사인듯.

팔순노인이 동안으로 돌아오다.
동자로 돌아오고 마른가지가 떨치는 신통한 효험이 빨라 팔순노인의 얼굴이 싱싱한 도홍색이라 내게 유천乳泉이 있어 떠서 수벽탕秀碧湯과 백수탕百壽湯을 이루니 어떻게 목멱산(*木不밑見山, 여기서는 서울의 남산을 지칭)앞에 지녀가 해옹海翁(*위의 해거도인)에게 드릴까.
*유천은 구체적으로는 특히 종유석의 샘을 말하니 석회암지대에 나는 흔히 쌀뜨물샘이나 미면米麵샘 등으로 불리는 뿌연샘물이 되겠으며 당집이나 절등이 따라 세워지곤 했다.

(李白云 玉泉眞公 年八十 顔色如桃李 此茗香淸 異于他 所以能還童振枯 而令人長壽也.
唐蘇이著 十六湯品, 第三曰百壽湯 人過百忍 水逾十沸 或以話阻 或以事廢 如取用之 湯已生性矣 敢問白+番빈蒼顔之老夫 還少執弓扶矢以取中乎 還少雄闊步以邁遠乎 第八曰秀碧湯 石凝天地秀氣 而賦形者也 琢而爲器 秀猶在焉 其湯不良 未之有也.
近 酉堂大爺 南過頭輪 一宿紫芋山房 嘗其泉曰 味勝酉+禾酪.

이백이 이르기를 옥천사玉泉寺의 진공眞公이 나이 팔십에 안색이 복숭아 오얏 같다 이 차의 향 맑음이 딴곳과 다르기에 동안으로 돌리고 시든것을 떨치며 사람으로 하여금 장수하게 하는 것이다.
당나라 소이가 지은 16탕품湯品에, 제3번째를 백수탕百壽湯이라 말하니 사람은 백번 참음을 격고 물은 열번 끓음을 넘긴다 혹 말을 더듬거나 일을 페하게 된것으로도 취해 쓸것 같으면 이미 본성을 생기리 감히 묻노니 흰 귀밑머리에 창백한 늙은이가 도로 젊어져 활을 잡고 화살을 겨누어 적중할수 있는가 도로 젊어져 웅장히 활보해서 멀리 갈수 있는가 제8번째를 수벽탕秀碧湯이라 하니 돌은 천지의 수기秀氣가 엉켜 형상을 받은 것이다 쪼아 그릇하면 빼어남이 오히려 존재하니 그 끓인 물이 좋지 않음은 있지않다.
근래에 유당대야酉堂大爺(*추사의 아버지 김노경)가 남으로 두륜산을 지나다가 자우산방에서 하루 묵었는데 그 샘을 맛보고 말하길 맛이 소락酉+禾酪보다 낫다.)

九難四香
又有九難四香玄妙用 何以敎汝玉浮臺上坐禪衆
九難不犯四香全 至味可獻九重供

구난 사향.
또 구난九難 사향四香의 현묘한 작용있으니
어떻게 가르칠까 너희 옥부대 위에서 좌선하는 무리들을
아홉어려움을 범하지 않으면 네 향기 온전하니
지극한 맛 구중궁궐에 올릴 수 있겠네
*초의는 산사에 적을 둔 몸이지만 불화를 그리는 솜씨를 갖춰 어진을 그리고 특산품을 지니고 명사들 사이를 오가며 소통한 사람으로 은근한 무슨 뜻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후 다른 말은 없는 듯하니 이때 차가 궁중에 까지 파고 들었다면 당시 우리 차의 국면이 더욱 열렸을 것이고 혹은 열릴것 같으면 그렇게 되었겠지만 아직 당시 조선에서는 차가 그렇게 기호품이 되지 못했고 수문제와 같은 계기도 얻지 못했다 또한 귀양지에서도 당지의 특산물을 갖고 진상하고 아울러 입지도 살려 사람과 물건이 서로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정약용이나 김정희 등이 모두 말년이 되자 겨우 귀양만 풀어 줬을 뿐으로 마치 복복하지만 죄를 짓고 벌을 피할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복이 있겠으며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식이되고 결코 제대로 반전해 권토중래한 것이 아님에도 기인할 것이다 물론 이는 결코 인물이나 차의 물건됨이 부족한데 기인 한다고 말할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른바 주역 비괘否卦에서 말한바 군자의 정貞함이 이롭지 않다 라고 하는 경우일 것이다.

(茶經云 茶有九難 一曰造 二曰別 三曰器 四曰火 五曰水 六曰炙 七曰末 八曰煮九曰飮 陰采夜焙 非造也 嚼味嗅香 非別也 羊+亶鼎腥區+瓦 非器也 膏薪포炭 非火也 飛湍壅水+寮 非水也 外熟內生 非炙也 碧粉飄塵 非末也 操艱攪遽 非煮也 夏興冬廢 非飮也.
萬寶全書, 茶有眞香 有蘭香 有淸香 有純香 表裏如一 曰純香 不生不熟 曰淸香 火候均停 曰蘭香 雨前神具 曰眞香 此謂四香.
智異山花開洞 茶樹羅生四五十里 東國茶田之廣 料無過此者 洞有玉浮臺 臺下有七佛禪院 坐禪者 常 晩取老葉日+麗乾 然柴煮鼎 如烹菜羹 濃濁色赤 味甚苦澁 政所云 天下好茶 多爲俗手所壞.
 
차경에 이르기를 차에는 아홉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하나는 제조요 둘은 감별 셋은 차그릇 넷은 불다루기 다섯은 물 여섯은 차덖기 일곱은 가루하기 여덟은 다리기 아홉은 마시기이니 음산한 날씨에 차를 따서 밤에 불 말리는 것은 그 제조가 아니며 차를 씹고 향을 맡음은 그 감별이 아니며, 누린솥에 비린잔은 그 그릇이 아니며 진나는 나무나 주방 숯은 그 불이 아니고 날아 내리는 여울물과 고인 물은 그 물이 아니고, 겉은 익었으나 속이 날것은 그 적炙이 아니며 푸르스름한 분진이 휘날리는 것은 그 가루함이 아니며 잡기 힘들어 후딱 휘젓는 것은 그 다리는 것이 아니며 여름엔 마시기 잘하고 겨울에는 그만 두는 것은 그 마시는 것이 아니다.
만보전서萬寶全書에 이르기를 茶에는 참 향香과 난향蘭香 맑은향 순진한 향이 있다. 안밖이 똑같은 것을 순진한 향, 설지도 않고 너무 익지도 않은 것을 맑은 향, 불이 고루 든 것을 난향, 곡우(4월 20일경) 이전의 싱그러움이 갖추어진 것을 참향이라 하니 이를 네가지 향기라 한다.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에 차나무가 사오십 리에 걸쳐 퍼져 자라는데 우리나라 차밭의 넓기로 아무것도 이를 넘는 곳이 없다 화개동에 옥부대玉浮臺가 있고 그 밑에는 칠불선원七佛禪院이 있으니 그 곳에서 좌선하는 자가 늘 늦게 늙은잎을 취해 볕에 말려 섶을 때어 솥에 삶는데 나물국 삶듯하니 짙고 탁하며 색은 붉고 맛은 몹시 쓰고 떫다 정무소에서 이르기를 "천하에 좋은 茶가 많이 속된 수완에 의해 훼손된다")
*만보전서는 경당증정만보전서의 약칭으로 오늘날 백과사전류의 종합서.
*당 피일휴의 서문에도 육우 이전의 차마시기를 일컫는 자는 훌 한데 삶아 채소를 삶아 마시는 것과 다를바 없었다 한다 차다리기가 그랬다면 차따기 역시 이에 준해 다 퍼진 잎을 들깻닢이나 두릅닢 따듯이 잡아 뜯고 한줌에 쥐 문댓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없던 음차법을 새로 개발한 사람들이라 할수는 없겠고 일부에만 전하던 보다 나은 음차법을 널리 유행시킨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위의 지리산 승려들의 차음은 완전히 초의가 전문차인으로서 약간의 자부심에 미처 진감 이래로 드리워 온 지리산 승려들의 차마셔 내려온 전통을 알지 못한데서 질색한 오해다 이무렵 까지 음차역사를 잘 살펴보면 이때 우리 차마시기가 서로간의 교류이동이 잦은 승려집단에 까지 그렇게 원시적이어서 그렇다고 볼수없다 그럴 형편이면 굳이 그렇게 까지 그런 차음을 해서 마시져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신라때 최치원의 진감화상비명(병서)에 보면,
"혹 호향胡香을 드리는자 있으면 기와로 뭉근 잿불에 실을뿐 환으로 만들어 굽지 않고 말하길 나는 이것이 어떤 내음인지 먹음이 아니라 마음에 삼갈따름이다 하였다 다시 중국의 차(*漢茗)로 이바지 하는자 있으면 섶으로 돌솥에 불땔뿐 가루해 삶지 않으며 말하길 나는 이것이 어떤 맛인지 먹음이 아니고 배를 적실따름이다 하였으니 참을 지키고 시속을 거스름이 모두 이런 류였다."


聰明四達.
翠濤綠香재入朝 聰明四達無滯壅
矢+引爾靈根托神山 仙風玉骨自別種

총명사달.
푸른파도 녹색향 이제 입조하니 총명이 사방트여 지체하고 막힘이 없네
하물며 너의 영험한 뿌리를 신산에 의탁하니 선풍옥골仙風玉骨이 스스로 별다른 종자로다

(入朝于心君 茶序曰 區+瓦泛翠濤 石+展飛綠屑 又云茶以靑翠爲勝 濤以藍白爲佳 黃黑紅昏 俱不入品 雲濤爲上 翠濤爲中 黃濤爲下.
陳鹿밑米公詩, 綺陰手+贊盖 靈艸試旗 竹爐幽討 松火怒飛 水交以淡 茗戰以肥 綠香滿路 永日忘歸.
智異山 世稱方丈.

주군되는 마음에 입조함이라 차서茶序에 말하기를 "잔에 푸른물결 뜨고 연자에 녹색가루 날린다" 하였고 또 "茶는 푸른취색으로 낫게 치고 물결은 여린쪽빛을 가佳하게 친다 누르고 검으며 붉고 어두운 것은 모두 품등에 들지 못한다 구름같은 물결이 위가되고, 푸른물결이 중품, 누런물결이 하품된다." 하였다.
진미공의 시에, 기비단의 얇은그늘로 덮개하고 신령한 풀로 기차旗茶를 시차試茶한다 죽로竹爐를 그윽히 심토하니 솔가지 불은 노하여 날은다 물은 담백으로 사귀는데<*논어에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 물같다 함.> 차싸움은 비유肥乳한 것으로 승부한다 녹색향 길에 가득하니 해 길도록 돌아갈줄 모르네.
지리산은 세칭 방장산方丈山이라 한다)
*진미공(1558-1639)은 陳眉公이라고도 하며 명나라 사람 진계유로서 당시 여러 명류와 차를 품론하던 사람인데 의흥의 자사기 명수인 시대빈이 듣고 작품으로 찾아뵈어 서로 교류가 있었다.
*차가 금방 싹터기 시작해 아직 보리톨 같은 눈을 맥과麥顆 또는 곡립穀粒이라 하며 작고 여린 싹줄기를 창槍 또는 침針이라 하고 아직 작은새(小추, 雀)의 혀처럼 부드럽고 매발톱처럼 한줄인 까닭으로 작설 또는 응취鷹嘴 응조鷹爪라고도 하며 아차芽茶 또는 소아小芽라 한다 여기에 잎이 펴이면 기旗가 되는데 한줄기에 한 깃발이 펴이면 일창일기一槍一旗로서 간아揀芽라고도 하며 두잎이 펴이면 일창이기로서 중아中芽라고도 한다 여기서 더 퍼지면 첨차 늙은 것으로 이후로는 아마 싹이라 하기보다 단지 지枝에 가까와 갈것같다 중아만 되어도 그다지 상품上品으로 치지 않기에 좋은 차를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라 한다 그러나 차경에서는 너무 여려 볶기 마땅잖아 찐다는 것과 달리 명때의 포차에서는 나개차는 볶기 마땅잖을 정도로 늙은 잎을 따기에 쪄서 만드는 것이라 하니 그래도 유명한 제품이 된것을 보면 또 나름대로 늙은 잎으로도 좋은 불발효차 제품을 만드는 방법이 있어 왔음을 본다.
*투시차鬪試茶는 명전茗戰이라고도 하며 송대에 유행하던 말차로 서로 우열을 겨루는 시합인데 잘 갈은 찻가루로 반죽해서 데운 검은잔에 놓고 탕수를 몇차례 나누어 개어 저으면 젖을 끓이고 식으면 위 표면에 뜨는 막膜인 소酉+禾소와 같이 점착질의 죽면이 뜨는데 이것이 얼마나 오래 잔에 물고 떠있느냐와 좁쌀 같은 꽃이 잘 피는 것 그리고 색이 얼마나 희고 깨끗하나 등의 우열로 승부한다 잔이 뜨겁지 않으면 죽면이 뜨지 않고 차가 희니 잔도 검어야 했다.
*사방 한길을 방장이라 하는데 유마거사가 이런 방에서 수도한데서 비롯한 선실을 가리키는 말이라하며 또 부처가 있는 곳을 말하기도 하고 주지를 일컫는 말도 된다한다

綠芽雲根
綠芽紫筍穿雲根 胡靴封밑牛臆皺水紋
吸盡水+襄水+襄淸夜露 三昧手中上奇芬

녹아 운근.
녹색싹 자주순은 구름의 뿌리를 뚫고 되 사람의 가죽신과 들소가슴에 주름진 물결무늬로다
양양한 맑은 밤이슬 다 마시고 삼매에 든 손안에 기이한 향 분분히 오른다

(茶經云 生爛石中者爲上 礫壤者次之 又曰 谷中者爲上 花開洞茶田 皆谷中兼爛石矣 茶書又言 茶紫者爲上 皺者次之 綠者次之 如筍者爲上 似芽者次之 其狀如胡人靴者蹙縮然 如封밑牛牛臆者廉治然 如輕飇拂衣者涵澹然 此皆茶之精月+臾也.
茶書云 採茶之候 貴及時 太早則茶不全 遲則神散 以穀雨前五日 爲上 後五日 次之 後五日又次之 然 驗之 東茶 穀雨前後太早 當以立夏前後 爲及時也 其採茶法 撤夜無雲 水+邑露採者爲上 日中採者次之 陰雨下不宜采.
老坡送謙師詩曰 道人曉出南屛山 來試點茶三昧手.

차경에 이르기를 난석爛石 속에서 난 것을 위로 치고 자갈흙에서 자란 것이 그 다음이라 하고 또 골짜기 안에 것을 위로 친다 했는데 화개동의 차밭은 모두 골안의 난석爛石이다 차서에 또 말하기를 "자색紫色을 위로치고 주름진 것이 다음이요 녹색綠色이 다음이며 순筍같은 것을 위로치고 싹 비슷한 것이 다음이다 그 모습이 마치 호인胡人의 가죽신 같다는 것은 쭈구러져 줄은듯하고 들소의 가슴 같다는 것은 서슬지게 다스려진듯 함을 말하고 가벼운 바람이 옷자락을 떨치는 같음은<*拂衣는 拂水의 착오로 차경에도 불수로 되어 있고 위의 시에도 추수라고 쓰있다> 잔잔한듯 함을 말함이니 이는 모두 차의 정수精髓다." 하였다.
차서茶書에 이르기를 "찻잎을 따는 시후는 때맞춤을 귀히하니 너무 이르면 차가 다 갖추지 못하며 늦으면 차신이 흩어지니 곡우에 앞선 5일을 위로치고 곡우뒤 5일은 다음이고 이후 5일은 또 그 다음이다" 하니라 그러나 경험해보면 우리차는 곡우전후는 너무 이르고 당연히 입하<*5월 5-6일경> 전후로 적당한 때를 할것이다 찻잎을 따는 법으로는 밤새도록 구름없어 이슬에 젖은 것을 딴 것이 상품되고 한낮에 딴 것이 다음되며 흐린 날씨에 비아래서는 따는 것이 마땅치않다.
늙은 소동파가 겸 대사를 송별하는 시에 말하길 "도인이 새벽에 남병산에 나갔다 와서 삼매의 손으로 차를 점주해 시차한다" )
*난석이라 한것은 특히 석회암이 풍화가 잘되기 때문을 말하는 것 같다 이름난 차로 석회암지대의 것이 많은 듯하다.
자아紫芽는 고산의 척박한 땅에서 난다하며 그 기미도 박하다한다 수분이 메마르고 영양이 넉넉치 않아 처음 잎이 나올때 빨갛게 나오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거름과 물을 충분히 준 온상상치와 척박한 땅에서 자란 노지 상치가 맛이 다르듯이 순도가 높을 것 같다 아芽는 가지의 눈에서 자란 것이고 순筍은 죽순이나 고사리처럼 그루터기나 뿌리에서 오른 것이고 묘苗는 종자뿌려 나는 것이 되겠다.
차를 우전 화전 등으로 따는 시기에 따라 상품가치를 분류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는 중국에서도 일부지대안에서도 특정장소에 따라 맞춰나온 말로서 그나마 산위의 응달과 산아래 양달이 서로 다르며 또 그해의 기후가 다소 이르고 늦은데 따라 차이가 나는 것으로 절대적 기준이 될수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마라도에 차를 심으면 우전에 따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종래 우리나라에서는 채차 시기에 따라 분류하지 않고 싹터는 정도에 따라 작설이라 한것이다.
*남병산은 절강성 항주시 서호의 근처있는 산이다 삼매는 참선의 가장 깊은 경지를 말하는 것이라한다.

莫分體神.
中有玄微妙難顯 眞精莫敎體神分
體神雖全 猶恐過中正 中正不過健靈倂

체와 신을 나누지 못함.
속에 현미하고 미묘함있어 나타내기 어려우니 참된 정수는 체體인 물과 신神인 차가 나뉘지 않게 함이라
체와 신이 비록 온전해도 오히려 중정中正을 넘을까 두려우니 중정은 강건과 영묘함을 아우르는데 지나지 않는다.

(造茶篇云 新採揀去老葉 熱鍋焙之 候鍋極熱 始下茶急炒 火不可緩 待熟方退 撤入竹밑徙中 輕團枷數遍 復下鍋中 漸漸減火 焙乾爲度 中有玄微 難以言顯
泉品云 茶者 水之神 水者 茶之體 非眞水 莫顯其神 非眞茶 莫窺其體
泡法云 探湯純熟便取起 先注壺中小許 湯밑皿衣+去冷氣 傾出然後 投茶葉多寡宜的 不可過中失正 茶重則味苦香沈 水勝則味寡色淸 兩壺後 又冷水蕩滌 使壺凉潔 不則減茶香 盖罐熱則茶神不健 壺淸則水性當靈 稍候茶水沖和然後 令布酉+麗飮 酉+麗不宜早 早則茶神不發 飮不宜遲 遲則妙馥先消.
評曰 采盡其妙 造盡其精 水得其眞 泡得其中 體與神相和 健與靈相倂 至此而茶道盡矣. 

조차편造茶篇에 이르기를 "새로 따온 찻잎은 늙은 잎을 가려내고 뜨거운 솥에서 茶를 불말리되 솥이 극히 열한 것을 보아 찻잎을 넣어 급히 볶고 불은 완만히 할수없으니 열기가 막 물러나기 기다려 걷어 대그릇 안에 넣고 가볍게 굴려 두루 털어 흔들고 다시 솥안에 넣어 점점 불을 줄이면서 불마르는 것으로 헤아린다 이가운데는 미묘함이 있어 말로 나타내기 어렵다".
천품泉品에 이르기를 "차茶는 물의 신神이요 물은 茶의 체體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그 신神을 나타낼 수 없고 진차眞茶가 아니면 그 체體를 나타낼 수 없다."
포법泡法에 이르기를 "탕湯이 순전히 익음을 탐지하면 바로 취해내어 먼저 차호茶壺 안에 조금남짓 부어 냉기를 가셔 내어 기울여 낸 뒤에 차잎을 많고 적게 적절히 넣고 적량을 넘어 바름을 잃지 않게한다 차가 많으면 맛이 쓰고 미끄럽지 못하며 물이 더하면 맛이 부족하고 색이 맑다 두번 차호에 탕수한 뒤에는 또 냉수로 씻어내어 호병이 시원 깨끗하게한다 그러지 않으면 차의 향을 감한다 대개 차관이 뜨거우면 차신이 강력하지않고 호병이 맑으면 물의 성질이 당연히 영묘할 것이다 조금 찻물이 우리어 충화된 뒤에 베풀어 걸러 마시게 한다 거르는 것은 조급함이 마땅치않으니 이르면 차신이 발하지 않고 마심에는 더딘것이 마땅잖으니 더디면 묘한 향이 먼저 사라진다."
평론해 말하니 차따기는 그 묘를 다하고 제조는 그 정精을 다하며 물은 그 참을 얻고 포차에는 그 적중을 얻어 체와 신이 서로 고루어지고 건健과 령靈을 서로 아울면 이에 이르러 차도는 다한다.)
*이상으로 여기 차도는 다른 뜻이 아니고 바로 차마시기 까지의 최선의 음료해내는 방도를 말한 것일 뿐아니라 차도는 이로 모조리라고 규정 되었다.

身上淸境.
一傾玉花風生腋 身輕已涉上淸境
明月爲燭兼爲友 白雲鋪席因作屛.

몸이 맑은 경지에 오름.
옥화 한번 기울이니 바람이 겨드랑에 일어 몸 가벼이 이미 맑은 경지에 올랐다
밝은 달로 촛불하고 벗도해서 흰구름 자리 펴고 이로서 병풍도 치네.

(陳簡齋茶詩, 嘗此玉花句 盧玉川茶歌 唯覺兩腋習習生淸風.

진간재陳簡齋의 차시茶詩에, 이 옥화玉花를 맛보다" 는 싯구.
노옥천盧玉川의 차가茶歌에, "오직 두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이 산들산들 나는 것만 느낀다")
*진간재(1090-1138)는 송나라 낙양사람 진여의陳與義로 자는 거비去非 간재는 그의 호 시에 능해 처음 황정견 및 그의 강서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남송초에 영남으로 피난오고는 비장처량한 시풍이 두보와 비슷했다 한다.
*노옥천(약796-835)은 당나라 범양사람 노동으로 옥천자라 자호하고 어려서부터 소실산에 은거하고 집이 빈궁한데서 힘들여 공부했다 감로의 변이 있을때 재상 왕애의 집에 유숙하였다가 왕애와 동시에 해를 입어 죽었다 옥천자 시집이 있고 그의 시는 자못 한유 맹교등의 찬사를 받았는데 시의 뜻도 뼈에 새길듯 하고 험한 바 있고 말은 유은했다한다 감로의 변이란 감로가 내렸다고 속여 환관들을 꾀어 들여 척살하려 했는데 중도에 바람이 불어 장막으로 가린 무사들이 탄 말의 다리가 드러나 발각되어 실패하고 이로 조정관리파 들이 반격 당한 사건을 말한다.

淸寒心醒.
竹竹밑賴松濤俱蕭凉 淸寒瑩骨心肝惺
惟許白雲明月爲二客 道人座上此爲勝

맑고 서늘히 마음 깨임.
대 바람소리 솔나무 물결이 모두 서늘하니 맑고 차가와 옥같은 뼈에 마음과 간장을 깨우네
오직 흰구름 밝은달만 두 손님 되는 것을 허락하니 도인의 자리위엔 이것이 나은것이 되누나.

(飮茶之法 客衆則喧 喧則雅趣索然 獨철曰神 二客曰勝 三四曰趣 五六曰泛 七八曰施也.
*철은 輟의 車 대신 口.

차 마시는 법은 객이 많으면 소란하니 소란하면 아취가 삭연해진다
홀로 마심을 신神이라 말하고 둘이를 승勝이라 말하고 서넛은 취趣 대여섯은 덤덤히 범泛이라 말하고 칠팔은 그저 시차施茶라 말한다)
*아무래도 사람의 남에게 나가는 입보다는 자신에게 들어가는 입이 솔직하다 할수있다 비록 요새 차가 많이 마셔진다고 하지만 아직 음료개발이 선전과 수요환경에 비해 따르지 못하는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차를 스스로 즐겨 찾는 경우보다 소비용도가 단지 접대용 시차로 주로 쓰여지고 있는 같다 외국차도 잘 쓰이지 않는 걸보면 아직 진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여타음료 보다 더 깊게 뿌리내려 정착된 습관성 음료로서 길들여지지는 못한 같고 또 식생활 풍토에 따른 차이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굳이 입을 차에 길들이려 하기만 할게 아니라 우리 풍토에 맞는 차를 개발해야 되겠고 게다가 보관방법과 유통과정 그리고 다리고 우리는 법도 따라 잘 맞추기 못하면 차맛의 요행은 바라기 어려운 것이 될것이고 단지 약삼아 일부 찾고 접대나 무얼 한다는 의례로 차려 시차해질 뿐이고 그나마 주니 생각해 대접하는 걸로 알고 마실따름이겠다.

白坡居士題 莫數雲澗月.
艸衣新試綠香煙 禽舌初纖穀雨前
莫數丹山雲澗月 滿鍾雷莢可廷年

백파거사가 제하다 운간월을 헤지마라.
초의가 새로 녹향연을 시차試茶하니 새혓바닥 처음 여린 것이 곡우 앞에 것이라
단산의 운간월을 헤지 말라 종지 가득 뇌협차가 수명을 늘일수있다)
*백파거사는 신헌구로서 추사와 학쟁을 나누었으며 뒤에 추사가 쓴 그의 비문이 있다 초의의 완당김공제문에도 손수 뇌협과 설유雪乳를 다려 같이 기울였다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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乞茗疏 乙丑冬 贈兒菴禪師.
旅人近作茶號밑食 書中妙벽(*璧자의 밑에 玉없는 벽) 全通陸羽之三篇 兼充藥餌 病裡雄蠶 遂竭盧仝之七椀 雖浸精瘠氣 不忘기(*其밑 실 사)毋경(*日巨밑火)之言 而消壅破煩 終有李贊皇之癖水+自乎 朝華始起 浮雲효효(*白이 셋 합자한 밝을효)於晴天 午睡初醒 明月離離乎碧澗 細珠飛雪山燈 瓢紫筍之香 活火新泉野席 薦白包之味 花瓷紅玉繁華 雖遜於水+路公 石鼎靑煙澹素 庶乏(*逼?)於韓子 蟹眼魚眼 昔人之玩好徒深 龍團鳳餠內府之珍頒已경(*聲에 耳대신 缶,磬임) 玆有采薪之疾 聊伸乞茗之情 竊聞苦海津梁 最重檀那之施 名山膏液 潛輸瑞草之魁 宜念渴希 毋心+堅波惠.


걸명소. 을축년(*1805) 겨울 아암선사에게 드림.
객지인이 근래 차를 탐하는 도철을 해서 글가운데 묘법은 육우의 차경 세편을 모두 통했고 약먹이도 겸해 하고 있습니다 병病속의 큰 누에 버러지가 드디어 노동이 일곱잔을 마시던 데까지 잠식하게 되었으니 비록 척기瘠氣가 정精을 침입한다는 기무경의 말을 잊지 않으나 막힌것을 사그리고 번민을 깨는 끝내 이찬황의 차즙 대어보기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지 않습니까 아침 햇살에 비로소 일어나니 뜬구름이 맑은 하늘에 희디희고 낮잠에 처음 깸에 밝은 달이 산골 푸른물에 저만치 떠있으며 잘은구슬과 날리는 눈 산의 등불에 자순차紫筍茶의 향을 바가지 뜨고 살은 불에 새로 길은 샘물의 들 자리에 하얀 꾸러미의 맛을 드려 올리니 홍옥같은 꽃자기의 번화함은 비록 로공보다 손색있으나 돌솥에 푸른 연기의 담백함은 거의 한자韓子에 빠질듯(*다가갈듯?) 합니다 해안과 어안의 옛사람들이 완호하던 것은 공연히 깊고 용단과 봉병 내부에서 진귀히 내려주신 물건은 이미 텅텅 비고 여기 나무하다 난 병이 있어 어떻게 좀 차를 구하는 사정을 폅니다 개인적으로 듣기에는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나루는 보시의 베품을 가장 중히 한다합니다 명산의 기름진 액이 몰래 상서로운 풀의 우두머리에게 보내 졌으니 마땅히 목마르게 바람을 생각해 혜택을 파급하시는데 인색하지 마시길.

*도(號밑食)는 도철의 도로서 재물을 탐하는 것을 도라 하고 음식을 탐하는 것을 철이라 하는데 보통 합해 도철이라 한다 좌전의 문공 18년의 글에 일찌기 진운씨에게 재주없는 아들이 있어 음식을 탐하고 화유貨貝+有를 무릅써 천하가 도철이라 불렀다 하고 여씨춘추에는 말하길 주나라 솥에 도철의 문양이 있어 머리는 있고 몸이 없으니 사람을 먹는데 목구멍을 넘기지 않아 해가 그 몸에 미친다 했다.
*노동(약796-835)은 당나라 범양사람 옥천자로서 맹간의에게 차를 받고 보낸 시에 칠완의 내용이 나온다 옥천자라 스스로 호하고 어려서부터 소실산에 은거하고 집이 빈궁한데서 힘들여 공부했다 감로의 변이 있을때 재상 왕애의 집에 유숙하였다가 왕애와 동시에 해를 입어 죽었다 옥천자 시집이 있으며 그의 시는 자못 한유 맹교등의 찬사를 받았는데 시의 뜻도 뼈에 새길듯 하고 험한 바 있고 말은 유은했다한다 감로의 변이란 감로가 내렸다고 속여 환관들을 꾀어 들여 척살하려 했는데 중도에 바람이 불어 장막으로 가린 무사들이 탄 말의 다리가 드러나 발각되어 실패하고 이로 조정관리파 들이 반격 당한 사건을 말한다.
*기무경은 대당신어에 나오는 우보궐右補闕 무경이니 그는 차가 하루 잠시 주는 이익이 있지만 척기가 정을 침하는 종신의 해가 있다고 경계한 말이 전한다 기무경의 기무는 복성復姓이니 무경이라 간칭한 것이겠다.
*이찬황(787-850)은 당의 재상을 지낸 이덕유李德裕로서 그는 조군사람인데 자는 문요文饒 길보자吉甫子라고 하며 찬황贊皇이란 호는 당 무종때도 재상을 하며 지방세력을 깍고 황권을 높이는데 극력하고 재상을 한데 관계되어 보인다 그 또한 멀리 혜산물을 길어 먹었으며 차에 감식안이 높았으며 차즙을 육식에 부어 시험해 본 일화가 전한다.
*뜬구름이 갠 하늘에 효효하다(浮雲효효於晴天)함은 차경의 오지자五之煮 편에 "또 맑은 하늘의 시원 명랑함에 뜬구름이 있는거와 같아서...(又晴天爽朗 有浮雲)"라는 구절이 있으며 효효도 곧 이 편의 파파연(白+番 흴파)의 파파와 같은 말이다 리리離離는 순자 비십이자편에 "사업에 노고하는데서는 려려연 리리연離離然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걸릴리의 뜻이 아니고 거리해 떨어져 있는 모습이다 즉 위 두구절은 모두 아침에 일어나서 말차를 저어 마심에 찻물에 흰꽃이 구름처럼 일어나는 모습과 저녁에 깨어서 푸른찻물에 달이 비친모습을 말하는 것이기도하다.
*세주細珠는 가루차를 탕에 붓고 저을때 이는 물방울이고 비설은 연자에 병단차를 갈기위해 연륜을 굴려 날리는 가루를 말한 것이며 산의 등불은 당 황보증의 육홍점 산인이 차따러 가는 것을 보내며 라는 시에 들밥에는 돌샘물 맑고 적적한 등불밤이란 싯구가 있다.
*참새 참꽃하면 새중의 진짜 새 꽃중의 참된 꽃 뭐 이런 의미로 부르는게 아니라 그 용례가 단지 서로 비슷비슷해 통털어 부르기 쉬운 작은 새무리중에 별난 한 종류를 말하고 철쭉중에 독이 있는 여름철쭉과 구별해 식용하는 봄철쭉을 지칭해 말하는 것임을 알수있다 엽차 또한 마찬가지로 특히 말차와 상대적 개념을 두고 부른 말이다 청송 취죽처럼 차나무잎이 푸르니 녹차라 하는가 보다 하거나 또는 국화차 생강차등의 광의의 다른 차개념과 염두해 녹차라 구별해 말하는 순무식은 없을듯한데 그래도 문외한들을 차밭에 몰아 놓아보면 무조건 녹차, 녹차밭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녹차라하면 특히 증제불발효처리로 가급적 엽록색을 살려 고정시킨 즉 증청차蒸靑茶를 일컫는 것으로 외국의 증청차를 위주하는 곳에서 여타의 다른 발효차, 특히 서양의 홍차와 스스로 상대적 개념을 두고 또한 서양의 green이란 유행어를 녹綠으로 한역漢譯하게 되면서 이 이미지를 따 선전하는 한 상품명에 가까운 것이 근간에 우리에게도 일컬어지기 시작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찻물이 붉기에 홍차라 부르는 것 그 또한 정작 서양에서는 가공된 발효차잎이 검다해서 블랙티라 부르는 것으로 알고있다 이래서 상품추구의 경향도 자연히 엽녹색을 위주로 대표해 나가게 되고 비록 불발효차라해도 자주싹이나 순은 녹차상품에 장애요소로 고려되어 보통 취용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아는데 그러나 녹차의 일반 제법이 중국의 명대에 쪄서 만들었던 나개차 방식을 따름에 잎이 점차 자라 퍼지는데 따라 당연히 더 푸르져가는 것에 기초하므로 채취의 기계화와 대량생산에 유리함을 타고 만드는 것과 달리 여린 것을 귀히했던 옛날부터 차의 자주싹이나 순은 녹색보다 오히려 적지않은 존중을 받아 온 만큼 만약 따로 자주것으로 골라 따모아 불발효차음을 만든다면 이는 녹차라 말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색의 개념도 다같이 사이색 이지만 녹綠이 황과 청의 간색間色인데 비해 자紫는 어두운색과 붉은색의 간색으로 개념도 상반되는 바가 있다 하겠다 차의 자주싹은 고산의 척박한 땅에 잘 나며 그 기미도 박하다 한다 즉 초목이 가뭄에 메마르고 탄 색에 가까운 것 같다 역시 차나무를 대나무 속에 키우거나 그늘을 지워 생장에 제한이 된 것과 비슷한 이치라 하겠다 아芽는 가지의 눈에서 나는 것이고 순은 죽순처럼 땅에서 오르는 것이다 대정기에 보면 건녕땅이 차세액이 가장 많은데 탐춘探春 선춘先春 차춘次春 자순紫筍의 네 품등이 있다고 했다.
*소동파의 시원전차시에 살은불에 새샘물을 귀히하고 로공의 차다리기가 서촉을 배워 정주의 꽃자기는 홍옥을 쪼은듯 이란 구절이 있으니 활화活火는 불꽃을 지닌 불을 말하며 뒤의 해안 어안도 탕을 끓일때 차례로 생기는 게눈알 고기눈알같은 작고 큰 기포로서 앞구절에 나온 세주 비설과 함께 역시 소동파의 위 시에도 나온다.
*한자는 당의 남양사람 한굉으로 자가 군평, 덕종때 중서사인을 했으며 대력십재자의 한사람이기에 한자라고 한 것이다 그의 잘 알려진 한식시에 푸른연기가 다섯제후의 집에 흩어 든다는 구절이 있다.
*용단 봉병은 송나라 웅번의 선화북원공차록에 보면 개보말년(968-976)에서 태평흥국초(976-983) 그러니까 976년경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 하며 찻가루를 덩어리 한 것에 용봉의 무늬를 찍은 상품말차로서 단團은 경단으로 둥근 것이고 병餠은 호떡처럼 둥글 납작한것인데 보통 용단과 봉병으로 만들었다 명나라 초 홍무24년(1391)부터 진상이 금지되고 엽차인 차아茶芽로 고쳐 올리게 했다 여기서 내부內府에서 준 용단 봉병은 물론 아암이 준것을 소문疏文의 형식에 따라 비유해 말한 것으로 호남에 엽전 모양의 돈차가 전한다하니 역시 이때 단병 형태의 말차를 만들어 주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이른바 전통차라하면 볶아 우려내는 불발효엽차 즉 초청차炒靑茶를 알고 말하지만 이는 비록 근래 광범위하게 퍼지고 깊이 박혔을지 몰라도 결코 묵은 뿌리는 아니며 수천년 우리 차음역사에 비하면 십분의 일도 안되는 아주 근세에 비롯한 일로 그 대표자는 바로 초의며 더우기 요근래 수십년에 증청불발효차와 같이 확산된 것으로 고려도경의 글이나 조선중기 허준의 동의보감등에 보더라도 쭈욱 말차였다 .
*채신지병采薪之病은 곧 예기 곡례편에 나오는 부신지우負薪之憂로 군주에게 자신이 나무하다가 몸살나서 지금 명에 응하지 못한다는 뜻의 자신을 낮추어 한말이다 이것이 맹자에서는 채신지우采薪之憂라는 말로 나타나는데 우憂는 병病의 뜻으로 채신지우나 채신지병 그리고 부신지우가 다 같은 말이라 할수 있는데 이 말들의 뜻을 살펴보면 시경 주남편의 여분시에,
여수의 큰 제방을 따라 그 졸가지 친다
군자를 보지 못하니 마음주림이 아침끼니를 거른듯
여수의 큰 제방을 따라 그 움가지 친다
이미 군자를 보니 나를 아주 버리시지는 않으셨다
방황어는 꼬리 빨갛게 닿고 왕실은 불난집 같아
비록 불난듯 하여도 부모 대단히 가까이 계시네. 하였으니 시란 당사자의 입장에 따라 기본적 바탕위에 각자 각색해 언지 할수 있는 것이지만 여기서 채신지우란 곧 걸명소 첫구절에 차산이 유배지로 떠돌게 된 자신을 려인旅人이라 한 것과 통하여 다시 왕명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수있으며 대국적으로 보면 차산은 비록 추사처럼 거듭 쫓겨나고 영 버려지게 되다시피 한 것은 아니고 후에 유배에 풀려 조정에 돌아가 승지의 벼슬 까지 받았지만 결국 나무하다 든 병이 깊어진 셈이 된듯 오래 임무를 맡지 않고 그만둔 것처럼 되었다 할수 있겠다.
*소疏는 성글게 틔운다는 뜻인데 곧 이로 사정을 통하게 한다는 뜻으로 후에 군왕에게 올리는 글을 소라했다 손초가 차를 보내는 글에 역시 차를 의인화 해서 만감후晩甘侯 열다섯 사람을 시중하는 재각에 보낸다는 내용이 전한다.
*당의 시인 두목의 제의흥차산시 첫구에 산의 열매는 동쪽 오땅이 빼어나고 차는 상서로운 풀의 괴수라했다.
*뜻이 대충 통하는 걸 보아 크게 본의에 어긋나는 오자나 탈자는 없는듯 한데 다만 원문을 직접 보지 못하고 문맥을 따라 추측해 글자를 고쳐 넣은게 적지 않으니 더구나 이로 확정할수없다 을축년 초 정순왕후가 죽자 다산은 시국이 바뀌어 이로 유배에 풀려 새로 털고 나설 것을 기대하는 청운의 꿈으로 자축하는 듯하니 역시 이글이 한편으로 은근히 조정에 올리는 글과 같게 되었다.
*1801년 정약용 강진유배.
*1805년 정약용 걸명소 지음.
*1818년 정약용 유배에 풀려 돌아가게 되자 18명의 남은 제자들이 차신계를 모음 이 차신계절목에서 정약용이 볶은 엽차와 말차인 단차를 언급함.
*1830년 정약용의 사문제자인 장의순이 초엽포차식炒葉泡茶式의 내용인 명나라 장원의 차록을 전재했던 만보전서의 채차론을 지리산 칠불선원에서 차신전으로 정서함.
*1836년 정약용 졸.
*1837년 장의순 18수의 연시로 된 동차송 지음.
*1840년 김정희 제주유배.